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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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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시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19170704_Riot_on_Nevsky_prosp_Petrograd.jpg|width=100%]] [[파일:7월 시위.jpg|width=100%]] 곪을 대로 곪은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은 전쟁 문제를 계기로 폭발했다. 5월 1일(4월 18일) 노동자들은 즉시 강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벌였고 같은 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는 [[협상국]] 측에게 제국 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지킬 것이며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통보했다. 5월 3일(4월 20일), 볼셰비키 세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 '밀류코프 타도'를 외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돌파구는 성공가능성이 낮은 하계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협상국의 요청도 있었지만 공세를 성공시킴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이중권력을 소멸시켜 부르주아 권력을 수립한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전 분위기가 매우 심각해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7월 1일(6월 18일)이나 돼서야 [[케렌스키 공세|서남 방면군에서 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7월 19일(7월 6일), 독일군의 역공에 4만 명의 사상자만 낸 채 임시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하계공세는 참패로 끝났다. 결국 민심은 더더욱 이반하였고,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발트함대, [[리가]], [[민스크]], 톰스크 등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따르지 않은 세력들이 점점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의회인 '라다'와 [[핀란드]]의 의회인 '세임'이 자치 움직임을 보이는 등의 민족 문제도 첨예화됐다. 결국 참다 못한 민중들은 7월 16일(7월 3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연대의 일부를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의 무장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소비에트 중심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연대 총회에서는 이를 위해 볼셰비키 당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부대와 공장에 대표를 파견해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많은 부대와 공장이 적극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볼셰비키]]는 이러한 무장봉기에 회의적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분명히 노동자와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전국의 민중 대다수가 아직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이때 멘셰비키는 율리 마르토프를 위시한 친볼셰비키 당내 좌파가 당권 장악을 시도했으나 임시정부에 친화적인 우파에게 밀려있는 상태였다.]를 따르고 있어 권력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 중앙위는 시위 자제를 결정했으나 민중들은 이미 볼셰비키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16일(3일) 저녁 7시 기관총 연대를 선두로 대규모 무장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도의 각 부대와 노동자도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가 [[볼셰비키]] 본부인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도착했고 스베르들로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제를 호소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시위대의 대답은 그야말로 부정적이었다. 시위대의 완강한 입장에 볼셰비키는 굴복하여 부득이 방침을 변경했다. '타브리다 궁까지 행진하여 대표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자'는 볼셰비키의 제안이 시위대에게 전달되었고 시위대는 이에 동의했다.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밤 10시경 소비에트 본부인 타브리다 궁에 도착했다. 밤 12시경에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5시간 이상 계속된 회의에서 시위대에 대한 압력행사에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소비에트 권력 반대' 결의가 채택되었다. 한편, 다른 방에서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혁명파 합동회의에서는 17일(4일)에 다시 시위를 전개로 결의했다. 7월 17일(7월 4일) 아침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무장시위를 금지하라고 경고하며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질서회복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카자크 병연대와 사관학교 생도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정부는 전선 사령부에 파병을 요청하기까지 이른다. 반면 시위대는 오히려 세력이 크게 늘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1만여 명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등 수도 근교로부터 병사와 노동자가 밀어닥쳐 시위대는 50만을 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판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던 볼셰비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시위대를 설득하는 바람에 7월 시위는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한편, 수도의 시위에 자극받아 지방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 발트함대, [[핀란드]], [[리가]], 이바노보 등지의 많은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외쳤고 많은 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지방은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혁명파보다 타협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봉기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힘을 얻은 임시정부와 타협파가 반격을 개시했다.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 주장했고 중립적이었던 이에 동조한 몇몇 부대가 임시정부에 붙었다. 전선에서도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도착했다. 7월 시위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7월 시위에서 볼셰비키의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본부가 점령되었고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발행이 금지되었다.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이 수색당했고, 반란에 가담한 부대가 해체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져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지하로 피신했고, 레프 카메네프, [[레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볼셰비키의 세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4월에 8만이었던 당원이 8월엔 24만이 되는 등 탄압과 비례하여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7월 시위와 이후의 탄압은 러시아의 세력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대부분의 러시아 평민들은 이제 임시정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뒤이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로 임시정부는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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